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인물 == 《[[헤이케모노가타리]]》(平治物語)에서는 >"이마요에 미친 자" 로 불리었으며, >"학문도 무예도 별 볼일 없는데 재주도 특기도 없다" 는 친형 [[스토쿠 덴노|스토쿠 상황]]의 혹평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당시 고시라카와 덴노에 대한 시선이 영 안 좋았고, 이들 간의 사이도 영 아니올시다였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일기인 《다이키》(台記) <닌표(仁平) 3년(1153년) 9월 23일조>에는 칸파쿠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가 [[고노에 덴노]](近衛天皇)의 뒤는 마사히토 친왕(고시라카와)을 제치고, 모리히토 친왕([[니조 덴노]])을 즉위시키자는 제안을 [[도바 덴노|도바 법황]]에게 올린 것에 대해 아버지 타다자네(忠実)가 타다미치를 몹시 비판하면서, 마사히토 친왕의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지적한 부분이 있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아들 타다미치에 대한 불만이 포함된 발언일 가능성도 있지만, 훗날 타다미치가 인의 근신이었던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와 대립하다가 고시라카와 덴노의 분노를 사서 폐문(閉門) 처분된 사실{《효한키》(兵範記) 호겐(保元) 3년 4월 20일, 21일조}을 생각하면 타다자네의 예측은 정확한 것이었다. 《교쿠요》 주에이 3년(1184년) 3월 16일조에 기록된 신제이의 고시라카와인에 대한 평가는, >"화한(和漢)을 통틀어 보기 드문 암주(暗主)" 라는 것이었다. >"일단 한 번 결정한 것은 다른 사람의 제지도 듣지 않고 기어이 이루고야 만다", "한 번 들은 일은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지 않는다" 는 고시라카와인에 대한 신제이의 평가라는 발언 자체는 구조 가네자네가 기요하라노 요리나리(清原頼業)에게서 듣고 적은 것으로 신제이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구조 가네자네 자신은, >"도바 법황은 평범한 군주로 처분에 대해서는 유감스런 부분도 있었고, 모든 것을 비후쿠몬인에게 넘겼다. 지금의 고시라카와 법황은 처분에 관한한 도바 법황보다는 훨씬 우수하다. 사람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이란 간단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도량이 넓고 자비가 깊은 인품이었다. 불법에 귀의한 모습은 그를 위해 나라까지 멸망시킨 [[무제(양)|양 무제]] 이상으로, 다만 [[다이고 덴노|엔기]]·[[무라카미 덴노|덴랴쿠]] 시절의 좋은 정치의 풍조가 사라진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지금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천하가 모두 슬퍼하고 있으니, 아침 저녁으로 법황의 덕을 받고 법황의 은혜로 명리를 얻은 무리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라며, 상투적인 조사(弔辭) 속에 불교 귀의를 비난하는 등, 인의 근신들을 비웃고 있다(《교쿠요》3년 3월 13일조). 고시라카와인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요청에 따라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내렸다가도 요시츠네가 몰락하고 나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다시 요시츠네 추포를 명하는 인센을 내리는가 하면, 요리토모로부터 [[오슈 후지와라]] 씨 추토를 명하는 인센을 내려줄 것을 요청받고도 이를 거부하다가 요리토모가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킨 것을 알고 나서야 '사후 승낙'의 형태로 오슈 후지와라 씨 추토의 인센을 내렸다. 자기 좋을 대로 무사들을 이용하고 또 버리는 법황의 행동을 요리토모는 >"일본 제일의 대텐구" 라고 비난했다.[* 다만 요리토모가 가리킨 '대텐구'란 인의 근신이었던 다카시나노 야스쓰네를 가리킨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즉 정설은 아니다.] 일단 서로 대립하던 상대라도 시간이 지나면 받아들여주는 도량도 있었다.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아들 모로나가가 태정대신이 되었고, 신제이의 아들들을 구교로 내세워 친정파로서 처벌했던 오이고몬 쓰네무네도 고시라카와인의 치세에서 20년 넘도록 사다이진을 맡았다. 또한 한때는 소홀한 사이였던 고노에 모토미치가 인의 총신이 되었고, 유배 문제를 놓고 히에이 산을 공격할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로 대립했던 천태좌주 묘운도 마지막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을 위해서 키소 요시나카군과 싸운 [[고시라카와 덴노#s-2.19|홋슈지 전투]]에서 전사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대립하게 된 이후로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안토쿠 덴노|토키히토 친왕]]의 황태자 책봉에 동의하는 등 키요모리와의 화해를 도모한 적도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추토를 명하는 선지를 내린 뒤에도 다카시나노 야스쓰네에게 >"호겐 이래로 반역이 잇따라 옥체를 보전하고자 이런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향후로도 반역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치세에서 몸을 빼고 싶구나."(《교쿠요》분지 원년 10월 25일조) 라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지만, 그를 제외하고 달리 귀족 정권을 다스릴 사람이 없었기에 마지막까지 정치 실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요리토모와의 악화된 관계는 겐큐 원년(1190년)에 요리토모의 상경으로 수복되었고, 이때 성립된 조정과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사이의 협조 관계는 '''[[조큐의 난|조큐(承久)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30년 동안 유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